트위터 계정 Unreported World 에서 위안부강제동원 할머니들 관련 영상을 게재하고 사실을 폭로했다. 그러나 항상 그랬듯, 일본 우익들은 무조건적으로 부정했다. 그 중에 눈에 띄는 것은 한국에 거주중인 한국형일본우익세력이었다. 전직 교수였던 류석춘 교수는 그것은 거짓말이라며 1살이든 90살이든 거짓말쟁이들' 이라고 위안부동원할머니들을 조롱하고 비난했다. 광복을 맞은 대한민국에 아직도 이런 사람이 숨쉬고 대한민국의 보호아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https://www.youtube.com/watch?v=hw2BIh8wY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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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일대수장은 일본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으로부터 받으며, 일본 회 침략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전범들이 받는 훈장이다. 2차대전을 일으키고 패전한 도조히데키, 이토히로부미 등..현재 한국에는 각계 정,경제계에 있다. 중국에는 사실상 한 명도 없다.

일본 대사들 그리고 욱일 이라는 명칭을 알고도 지금까지 받고있는 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https://www.youtube.com/watch?v=28Na73yzyd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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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잔인한 사건은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0년 비문명적인 , 지금은 패망한 일제의 야만적인 통치를 피해 만주로 이주한 한국 (당시 명칭은 대한제국 멸망 후 '조선')인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를 굴복시키고 ,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는 등 엄청난 위력을 과시하던 일본제국군대는 1920년. 만주에서 활동하던 한국의 군대와 부딫힌다.

 명색이 전승국으로 아시아의 최강이라 자만했을법한 일본의 군대는 봉오동 전투에서 홍범도장군에게 대패한다. 굴욕을 겪고 자존심이 상했는지, 마적단에게 대가를 쥐어주고 자신의 공사관에 불을 질러달라고 했다.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정규군을 보내서 봉오동 전투의 패배를 복수하고 자존심을 찾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복수심에 불탄 나머지 자신들의 공사관까지 태운 일본, 복수는 어떻게 됐을까. 

 일본은 공사관이 불 탄 것을 독립군의 소행으로 뒤집어띄우고 만주로 자신들의 군대를 파병할 수 있도록 중국에 요구했다. 중국은 청일전쟁에서 크게 패했으므로 일본의 요구를 감히 거절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열이 바짝 오른 일본의 복수는 어떻게 됬을까.

 만주로 건너간 일본 정규군은 어랑촌, 천수평, 고동하 등 청산리 지역의 여러 곳에서 독립군과 마주쳤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예측불가하게 나타나는 홍범도장군과 지형지물, 날씨, 심지어 말의 배설물까지 전략으로 활용한 김좌진장군의 부대에 손쉽게 죽어나갔고, 심지어 겁에 질린 상태로 안개 뒤의 누군지도 모를 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안개 뒤의 적은 자신들의 아군, 일본군이었는데도 말이다. 

 일제는 예상도 하지못한 굴욕에 얼마나 분노했는지, 1920년 간도에 있는 민간인들을, 군대를 파견하여 목숨을 모조리 뺴앗았다. 마치 야구방망이와 칼을 들고 맨주먹인 사람을 때려눕힐려다가, 도리어 자기가 코피가 터지도록 두들겨 맞고 발로 밟힌뒤에, 분하고 화가 치밀어 오르니 몽둥이를 들고 다시와서 옆에있었던 아이를 때리는 것과 같았다. 

 간도참변, 혹은 경신참변이라 한다. 일본의 비문명성은 이미 1900년도 초반부터 익히 잘 드러나지만, 경신참변이나 중국민중들을 학살할 여과없이 드러난다.

이 사실은 아래 백과사전 링크에서도 자세히 알 수 있다.

패배감과 자격지심에 찌들어 있던 일본은 어린 여자아이를 때려서 죽이고, 청년들을 한 곳에 불러모으고는 찔러서 하나하나 죽였다. 그 모습을 보고 울부짖는 여자들과 부인들을, 죽어가는 아들과 딸, 남편, 그리고 아버지, 시댁식구들 앞에서 강제로 겁탈하고 그리곤 여지없이 죽여서 목숨을 버렸다. 해당 사건이 어떻게 밝혀지게 되었는지 아래 지식백과에 잘 묘사되어 있다. 

첫번째로 일본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을만큼 무자비하고 반 인륜적이고 비문명적이었다는 것과, 
그 반면에 그만큼 우리 독립군이 강하고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참고로 봉오동, 청산리 전투 이전에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삼둔자 전투에서도 승리하였다. 가장 전투규모가 큰 전투는 청산리에서 여러번 일어났던 청산리대첩이다. 

 

관련정보-지식백과

terms.naver.com/entry.nhn?docId=657708&cid=46623&categoryId=46623

 

경신참변

1920년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해 간도에 거주하던 한국인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 [역사적 배경] 1919년 3ㆍ1운동을 계기로 한ㆍ만 국경지대에는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어 활발한 독립 전쟁

term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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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파 박중양은 일제를 등에업고 대구군수/충남도지사를 지냈으며,
자제단의 단장으로서 3.1운동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던 사람들을 방해한 인물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문화자산인 대구읍성을 파괴하여 일본인에게 제공하였던, 일본인에게 아주 고마운 존재였습니다.

박중양은 지역상권을 일제에 넘겨주는 등 3.1운동 전후로 수많은 친일행각을 저지른 친일파로서 '이토히로부미의 양자'라고 불렸습니다.  그는 말년에 지금의 대구 침산동에 살았으며 그의 공덕비가 있었으나 1990년대에 시민들의 힘으로 박중양의 후손들이 자진해서 철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친일파 박중양에 대해서는 아래 기사들에서 자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토에게 잘보여 귀국 후 대구군수 겸 경북관찰사서리가 되었다. 이토는 박중양을 철두철미하게 신용하고 애지중지하였고 양자로 삼았다.'
www.yeongnam.com/web/view.php?key=19970311.00000014.000010

 

< 대구.경북 근.현대인물사 . 5 > 박중양

우리가 흔히 3.1운동을 거족적 민족운동이라고 말하지만, 3.1운동 당시이를 반대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3.1운동을 `사리를 헤아리지 않고 국정을 알지 못하는 자의 경..

www.yeongnam.com

 

www.yeongnam.com/web/view.php?key=19960813.00000001.000140

 

박중양의 친일행각...일본에 지역상권 넘겨주려해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로 소문난 박중양은 대구군수 및 경북관찰사, 중추원 참의를 지낸 7대 친일파의 한사람으로 49년 1월 반민특위에 의해 구속돼 조사를 받다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www.yeongnam.com

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34244

 

친일파 때문에... 대구가 잃어버린 아름다운 성

[대구 완전 학습] 왕의 불허에도 일본 위해 대구읍성 부순 박중양

www.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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